by jslky » 2004-10-03 Sun 6:10am
블루스/하드락/정통메탈 [참고] 펑크의 표적- Led Zepp... 번호: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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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시 자 : 에랄랄라(윤세민)
게 시 일 : 98/04/12 00:3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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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그 폭발하는 젊음의 미학 이라는 책의 일부를을 옮기다시피 했습니다. 임진모씨가쓰셨고 창공사에서 나왔습니다. 담에 기회가 되시면 꼭 사서 보세요.
70년대 엘리트들... 펑크의 표적들
우리는 우리가 최고 밴드라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2등인 그룹보다는 나은 그룹이라고 생각한다.
로버트 플랜트는 지난 75년 록 평론가 리자 로빈슨에게 자신들의 그룹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나 플랜트가 자랑하는 제플린의 위대함은 부인하기 어려운 뚜렷한 한계를 지닌다. 그 찬란한 명성은 70년대와 록 문화에만 국한된다는 사실이다. "그들 베스트 음악의 위력과 대중적 어필의 영구성에도 불구하고 제플린은 록문화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고 지적한 바 있다. 그의 주장처럼 제플린의 강한 록은 비틀스의 섬세함, 밥 딜런의 철학적 깊이, 롤링 스톤스의 자유분방함에 길들여진 기성세대에게는 폭넓게 어필하지 못했다. 그들의 응원군은 어디까지나 록 대중이었고 록 매니아였다.
하지만 록무대로 범주를 좁히더라도 그들이 받은 평점은 만점이 아니었다. 록은 본질적으로 50년대 중반에 태동된 이래 기존과 기성을 거부하는 저항성과 폭발성이라는 특성을 지녀왔다. 헤비메탈의 형식미를 완성시키는 등 외형에 있어서 제플린의 파괴력은 이의를 제기할 수 없지만 그들에게서 시대와 사회에 의문을 던지는 메시지 측면의 록 윤리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그들의 록은 예술적 충격일지는 몰라도 록 특유의 사회적 충격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물론 그들에게도 모든 로큰롤의 심장부에 도사리는 도피, 탈출과 같은 어두운 정신의 발산은 있다. 오히려 찬란한 천재적 역량으로 그 것을 세련되게 표현했다. 그러 나 그들은 록 대중의 귀를 한차원 끌어올렸을 뿐이지 록 스타로서의 지도력은 행사하지 못했고 또 그러한 시도도 하지 안았다. 그것은 60년대 말 최후의 히피밴드로 규정되는 그룹치고는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부조화된 행보였다.
그들은 실로 록의 사회성에 헌신한 미국의 사이키델릭 록 그룹과 달리 크림처럼 록 예술의 진수만을 탐구하는데 열중한, 지극히 영국적인 그룹이었다. 이것은 급기야 영국 후배 뮤지션들에게 반격의 빌미를 제공한 치명적인 약점이 되고 만다.
어쨋든 지미 페이지의 풍부한 전통 기타 주법, 플랜트의 가장 메탈적인 보컬, 존 보냄의 가공할 해머 드러밍, 존 폴 존스의 능란한 베이스라는 특별한 결합으로 제플린은 70년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성을 쌓았다. 인기가 절정에 오른 75년에는 그들이 발표한 앨범 6장 모두 빌보드 차트에 오르는(록 최초) 경이적 기록을 낳았고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의 3번 공연 티켓이 4시간만에 완전 매진되는 광풍이 야기되었다. 심지어 당시 제럴드 포드의 백악관에서 그들의 명곡 Stairway To Heaven이 울려퍼졌으며 포드 대통령의 딸들이 티비에 출연, 레드 제플린을 가장 좋아하는 그룹이라고 털어놨기때문에 헤드라인을 장식하기도 했다.
이러한 폭발적 흡인력은 아름다움을 식별하는 안목이 없더라도 금방 포착되는 놀라운 예술적 사운드에 기초한다. 디스토션을 주무기로 하는 지미의 다채롭고 명암이 섞인 기타 플레이는 세련되기 그지 없었다. 프로듀서인 그의 관심은 언제나 사운드의 질감에 쏠려 있었다. 그는 소리의 응집력을 높이기 위해 리버브와 에코를 사용했고, 항상 베이스 드럼과 같은 저음에 치중해 기능주의를 위한 스튜디오 뮤지션 솜씨의 정점을 제시했다. 거기에 마치 그림과 같은 플랜트의 하이톤 보컬이 있었으니 어떤 경쟁자도 그 정교한 헤비 사운드의 전형앞에 무릎꿇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장르에 대한 식욕 또한 놀라웠다. '헤비블루스'만 한 것이 아니었다. Crunge에서 펑크를 결합시킨 것이나 Condy Store Rock에서 로커빌리, D'yer Make'r라는 곡에서 레게, Fool in the rain에서 살사, Going To califonia에서 포크, Down by the seaside에서 컨트리를 접목하는 등 다양한 쟝르에 손을 댔다. 심지어 모로코풍 음악과 인디언 리듬에도 손을 댔다.
서커스지는 지난해 "제플린을 역사상 중요한 하드록 그룹으로 올려준 것은 단지 그들의 초강력 해머링이 아니라 쟝르에 있어서 그들이 발휘한 광대한 영향력"이라고 그들의 가치를 평가했다. 68년 지미 페이지가 야즈버즈의 잔재를 모아 결성한 제플린은 그러한 거시적 음악 접근을 토대로 70년대 초반 비틀스, 사이먼 앤 가펑클, 지미 헨드릭스가 사라져 공허함을 느끼는 팬들의 텅빈 가슴을 파고드는데 성공, 일약 우상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제플린의 음악은 앞서 지적한대로 예술 지상주의로 치우치면서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은 너무 많은 돈을 벌었다. 이 두가지 측면을 겨냥, 70년대 말 영국의 젊은 록 그룹과 팬들은 강한 분노를 퍼뜨렸다. 버진 록 백과사전에는 플린은 77년까지 중단없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후 젊은 세대로부터 공룡화된 록의 오만한 종사자의 대표적 사례로 비판받았다고 기록한다. 그 젊은 세대란 섹스 피스톨스, 클래시, 댐드가 지휘한 펑크(punk)진영이었다. 이들은 "기업화된 록의 풍토에서 배부른 제플린은 더 이상 고통받는 청년들의 심정을 대변할 자격이 없다"고 성토했다.
그들은 참으로 70년대적이었다. 이상주의의 60년대 그룹도, 탐욕의 80년대 스타들도 아닌 그들의 이미지는 자극과 개인주의로 점철된 70년대 정서와 맞물렸다. 짖궂은 장난이 트레이드마크였고 그들의 호텔 부수기는 아주 유명한 것이었다. 어느 호텔에서는 그들에게 수리해야할 방을 주기도 했다.
제플린에게 참으로 인상깊은 것인 존 보냄의 사망 후 멤버 충원을 않고 그대로 해 산을 결정한 것이다. 그들은 수시로 멤버가 바뀐 딥 퍼플(나우누리 메틀동 하드록 부분에 가보면 딥 퍼플 패밀리라는 아주 좋은 글이 있습니다.)과는 달리 멤버들간에 별 반목없이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이 록의 전설로 추앙되어야 할 이유는 많다. 그들은 가능한 싱글 발표를 꺼리고 앨범 전체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 전설의 한편에는 아픈 구석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에 대한 평가는 시대적인 환경의 변화에 따라 나름대로 부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실로 제플린은 록의 진정한 면모가 과연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반추케 하는 전형적인 그룹이다.
블루스/하드락/정통메탈 [참고] 펑크의 표적2- QUEEN 번호: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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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시 자 : 에랄랄라(윤세민)
게 시 일 : 98/04/19 22:5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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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그 폭발하는 젊음의 미학.
임진모저
창공사.
궤도이탈한 록으로 애증이 교차한 남자 '여왕'
퀸은 서로 색깔이 확연히 다르다는 점 때문에 본의 아니게 후배 그룹 섹스 피스톨스와 깊은 관계를 갖는다. 퀸의 역사적인 싱글 보헤미안 랩소디가 발표된 지 1년 후 펑크 폭풍이 불어닥쳤다. 섹스 피스톨스는 부피가 팽창한 록음악과 그에 따른 사치스러운 라이프 스타일에 반기를 든, 이 게릴라 진영의 선두주자였다.
록 본연의 원시성을 회복하고자 한 그들에게 스튜디오 테크닉에 의한 복잡한 예술 성이 부각된 보헤미안 랩소디는 소탕해야 할 모든 것을 지니고 있는 제도권 록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피스톨스는 퀸이 Got Save The Queen 을 연주한 것과 같은 제목의 노래를 만들었다. 그러나 퀸의 것이 영국 애국가의 웅장한 기타 버젼이었던 반면 피스톨스의 것은 신은 허울좋은 영국 왕실과 그 여왕을 비호하고 있으며 그래서 신은 남자다! 라는 비아냥조의 곡이었다. 전자가 영국의 무궁한 번창을 기원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영국의 현실에 대한 전면 부정이었다.
더욱이 피스톨스는 이 곡을 여왕 즉위 25주년 기념식 행사에 맞춰 발표했다. 이때 영국의 레코드 산업협회는 그 행사를 기념하여 영국 음악 25주년을 결산하는 최우수 곡을 선정, 브리타니아 어워드로 포상했는데 그 영예의 곡이 다름아닌 보헤미안 랩소디였다. (프로컬 할럼의 A Whiter Shade of Pale과 함께).
(두 밴드는 잠시이긴 하지만 레코드사에서 함께 활동한 적이 있다. 물론 명랑하고 즐겁게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퀸은 정치적인 측면과 음악의 분리선을 유지하며 비정치성으로 일관했다. 정치에 무관심한 밴드임을 공공연히 밝혔디. 자신들의 음악을 원하면 어디든지 가는 그룹이었다. 그런데 이같은 비정치성이 큰 화를 부른 어이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들은 84년 8월 흑인차별정책 즉 아파르트에이트로 악명 높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이 9000만달러들 들여 보츠와나에 건설한 초호화판 유흥지인 선시티에 초청되어 축하공연을 가졌다. 당시 남아공은 유엔의 경제 및 문화 제재를 받고 있는 상태였다.
퀸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의식 없는 록그룹'이라는 지탄을 받아야 했다.
브라이언 메이는 선 시티 공연이 잘못된 것이 없다고 지금도 주장한다. "우리는 흑인차별정책에 반대한다. 우리의 비지니스 매니저 짐 비치가 상황을 따지기 위해 그 곳으로 갔었다. 그리하여 빠지기보다는 가서 아파르트헤이트의 종식을 이루자는 결정을 내렸다."
퀸은 출연료의 상당 액수를 선 시티 인근의 흑인 장애소년 학교에 기부했다. "많 은 사람들이 분명 우리를 파시스트돼지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우린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죄가 사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남아공 백인지배를 편들었다는 이유로 비판의 목청을 높였다.
퀸의 정치적 무의식이 낳은 사건이 84년 10월의 브라질 공연에서 있었다. 프레디가 I Want To Break Free 를 위한 소도구로 가발과 인조 유방을 착용했을때 갑자기 객석에서 깡통과 돌이 날라왔다. 그는 능란한 무대매너로 관객을 진정시키기는 했지만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그러나 곧 이 노래가 현지 사람들에게 독재를 반대한 신성한 메시지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런 소중한 노래가 무대에서 괴롭힘을 당하자 항의 표시를 한 것이었다. 이 곡은 또한 아파르트에이트 철폐를 위해 싸운 남아공의 지도자 넬슨 만델라의 ANC가 자유의 찬가로 선정한 곡이기도 하다.
퀸은 85년 라이브 에이드에 참여, 환상적인 무대를 펼쳐 선 시티의 불명예를 얼마간 씻었다. 이 때부터 퀸도 의혹을 제쳐 버리고 자선 공연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한다.
퀸은 대중과 비평가들 간의 현격한 차이를 경험하는 아티스트들중에서도 선두에 해당한다. 평론가 집단은 퀸의 어떤 부분을 문제삼았는가. 퀸의 독특한 매력의 원천은 록음악의 상식적인 틀을 넘어선 혁신적인 악곡 구성과 탁월한 보컬이다. 그러나 록 비평가들은 보헤미안 랩소디, 섬바디 투 러브등에서 발견되는 퀸의 트레이드마크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록이 지켜야 할 정통을 이탈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프레디의 보컬도 인정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평자들의 냉담함은 퀸이 데뷔시 창조적인 음악세계를 펼치지 못했고 그러한 한계를 비정통적 과잉의 음악으로 타개했다는 점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Another One Bite The Dust, Love Of My Life가 대중들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고 We Are The Champion이 경기장과 선거장에서 그토록 울려퍼져도 유수의 록언론들은 그들의 앨범을 우수작으로 추천하지 않았다.롤링스톤, 크림,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 등이 꼽는 명반 대열에 낀 적이 한번도 없다.
이 다음 내용은 주제랑 상관 없어서 그만....
블루스/하드락/정통메탈 [참고] 펑크의 표적3 - ERIC C... 번호: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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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시 자 : 에랄랄라(윤세민)
게 시 일 : 98/04/25 20:4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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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클랩튼
"내 주변과 기타밖에 난 몰라."
에릭 클랩튼을 보는 구미의 음악 평론가들, 특히 록 평론가들의 기분은 매우 찹작 하다. 그처럼 영욕이 교차한 록 뮤지션도 드물어 어떤 하나의 범주로 그를 규정하기 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평가도 크게 엇갈린다. 한쪽에선 그를 기타의 신으로서 누구도 견줄수 없는 기타 예술의 경지를 연출한 동시에 록계에 블루스 붐을 야기시킨 전설 적 인물이라는 무한대의 칭송을 아끼지 않는다. 반면 다른 한쪽은 록이 기본적으로 젊음의 시대정신을 떠안는 장르임을 전제하며 그가 너무도 개인적인 문제에 집착한 나머지 주변이 감시에 소홀했다는 반론을 제기한다. 우리는 그에 대한 호평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비판의 소리에는 그다지 익숙치가 않다.
그를 보는 시각의 분기점은 그가 슈퍼그룹 크림(Cream) 에 몸담고 있던 때인 68년이 된다. 다름 아닌 당시 조지 해리슨의 아내였던 팔등신의 미인 패티 보이드와 로맨스가 싹틀 시점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에릭 클랩튼과 패티의 로맨스는 록 역사상 가장 돋보이는 러브 스토리로 정평이 나 있다.
이 무렵 그는 비틀스의 기타 주자였던 조지와 교분이 두터워져 (당시 나온 비틀즈의 화이트 앨범 수록곡 White my gently weeps에 에릭의 연주가 들어있다. )자주 조지의 집에 저녁 식사 손님으로 초대받곤 했다. 에릭은 패티의 여동생인 폴라를 돌봐주면서 조지와 Badge 라는 곡을 같이 만들기도 했지만 눈길은 전직 모델이었던 패티에게 쏠려있었다. 패티는 남편이 종교에 빠져 가정사를 게을리 하자 조지의 질투심을 조장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에릭에게 추파를 던졌고, 사랑 경험이 많지 못했던 그는 통제하기 어려운 짝사랑의 미궁으로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패티의 전술은 효과적이어서 조지는 아내의 품으로 돌아왔고 목적을 달성한 그녀는 곧바로 에릭에게 딱지를 놓았다.
사랑의 패자가 된 에릭은 실의에 빠졌고 데릭 앤드 도미노스시절의 71년 명반 Layla & the other love song 에 연정의 고통을 쏟아부었다. 여기서 싱글로 발표된 록의 고전 Layla의 제목인 레일라는 패티를 지칭한 것이다.
"난 너의 아저씨(조지)가 널 실망시켰을 때 널 위로하려 했지. 바보처럼 난 너와
사랑에 빠진거야. 넌 나의 세계 전체를 뒤죽박죽 흔들어 놓았지.' -레일라중에서- 정말 에릭은 뒤죽박죽 엉망진창이 되었다. 레일라의 평판이 좋지 않았고 여인에게 버림받은 실연에다 사랑하는 동료인 지미 헨드릭스와 듀언 올맨이 잇따라 죽고 부친도 사망하는 줄초상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만신창이가 되고 만 그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70년대 초반 내내 마약과 벗하게 됐다.
여기서부터 그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시작된다. 딴 로커들과 달리 그는 음악을 사회로 이동시키는 역사인식이 없었던 것이다. 진보적인 록뮤지션에게 발견되는 민중적 한으로의 승화는 아예 기대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관심조차 없었는지도 모른다. 또 마약의 경우만 하더라도 60년대 사이키델릭 로커들에게 있어서는 의식 확장의 방편이었으나 그에게는 오로지 자신의 고통을 덜어 주는 수단에 머물 따름이었다.
그는 실로 70년대 생기 잃은 록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73년 로버트 스틱우드의 도움으로 별장에서 요양하면서 약물중독에서 벗어나 만든 461 ocean boulevard 는 재기 성공작임에도 불구하고 활력이 뚝 떨어져 있었다. 이때부터 그의 기타는 느긋한 느낌, 이른바 레이드 백(laid-back - 단순하고 느긋하게 낮은 소리로 연주하는 것. 컨트리록에서 많이 나타나며 70년대 록 연주의 일반적 경향이기도 했다.) 스타일로 전환되었다. 그것은 자신의 세대인 베이비붐세대의 '고요로의 전환'을 대변하는 것으로, 분노한 신세대인 펑크집단으로부터 집중 성토를 당한 것도 이 대목이다.
그는 이 무렵 약물로부터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알코올 중독자 갱생회가 단골 출입처가 될 만큼 음주와는 결별하지 못했다. 패티에 대한 연정도 변함없었다. 그러나 사랑에는 기쁨도 있는 법, 77년 패티가 조지와 이혼하게 되자 에릭은 마침내 그녀를 쟁취해 품에 안는 경사가 있었다. 이때문에 79년 미국 47개 도시를 순회하는 공연 도중 첫 무대를 마치고 일정을 중단해 가며 대망의 웨딩마치를 거행할 정도였다. 78년 그의 명곡 Wonder tonight 는 바로 패티를 얻은 기쁨을 담은 노래이기도 했다.
한편 79년 5월에 있었던 그의 결혼 축하연은 70년 해산한 비틀즈의 멤버 셋이 처음으로 모여 함께 노래를 부른 자리라서 더욱 뜻깊었다. (존 레논만 빠짐)
하지만 이 로맨스도 오래가지 못했다. 6년만에 별거를 했는데, 이유는 에릭이 로리델 산토라는 이탈리아 출신 여배우와 동거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별거중이던 당시 에릭은 이렇게 말했다. "현재 우린 헤어진 상태지만 여전히 진실로 사랑하고 있다. 패티와 나는 진실로 사랑하고 있다. 패티와 나의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 관계를 완벽한 로맨스로 본다는 데 있었다. 우리는 그런 착각에 맞춰 살아야 했다. 그에 따른 긴장때문에 우린 깨지고 만 것이었다. "
여자가 바뀐 것처럼 기타와 음악에 대한 사고도 바뀌었다. 당시 그는 에이피통신과의 회견에서 "난 이제 과거와 같은 에너지와 속도가 없다." 며 "지금부터는 레코딩 으로 돈을 벌 참이다"라고 말했다. 이를테면 옛날에는 음반이 안팔려도 개의치 않고 공연에만 열중했는데 이제는 음반판매로 보상받고 싶다는 얘기였다. 그는 늙었다. 그것은 과거 야즈버즈시절 그룹에 히트싱글에 주력하는데 반발, 지체없이 팀을 탈퇴한 것과 비교할 때 엄청난 돌변이었다.
그마저 상업성에 물들어 가고 있다는 일부 팝 관계자들의 비판이 제기된 것도 이때였고 스타일도 자주 변화시키면서 불꽃퇴는 테크닉과 인열을 끊은 채 톤을 낮춘 레이드 백 연주를 의도적으로 고집, 객석으로부터 잇단 불만을 산 시기였다. 록의 특질가운데 하나인 폭발성과 담을 쌓은 것 때문인지 실제로 록 비평가들은 그가 80년대에 발표한 앨범들은 거의 명반으로 꼽지 않는다.
산토와의 관계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91년 봄 그는 부부생활을 청산하고 호텔에머물던 중 그녀와 살던 뉴욕 맨해튼 아파트 53층에서 아들 코너가 실족해 떨어져 죽었다는 비통한 전갈을 받았다. 그 바로 전인 90년 여름에는 자신의 공연 파트너였던 기타리스트 스티비 레이 본등 멤버 넷을 한꺼번에 비행기 추락으로 잃는 사건 을 맞은 뒤라 70년대 초반같은 불행의 늪속에서 다시 휘청거려야 했다. 그에게 있어 가장 감동적인 일이라면, 이 폐인 상태에서 빠져나와 통기타를 들고 Tears in heaven을 탄생시킨 것이었다. 그는 아들에게 바친 이 곡으로 히트 차트 석권은 물론 그래미상 6개 부분을 휩쓸며 재기에 성공했다.
팝 역사상 그만큼 아들의 죽음, 실연, 벗들의 사망, 알코올 및 헤로인 중독 등 갖가지 시련으로 점철된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뮤지션은 없을 것이다. 다른 가수의 컴백 성공담보다 그의 것이 감동을 주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매스컴이 그가 역경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선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대서특필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뉴스 위크 지는 92년 "그의 새 노래 '천국의 눈물'은 영원함이 다소 부족하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의 말대로 노래를 만드는 것이 자기 치료의 한 과정이라면 영원함은 문제되지 않을 수도 있다." 고 썼다. (근데 이 영원함이 뭘 말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음.-에랄랄라) 노래는 분명 자기 치료로부터 출발할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그것은 타인 또는 환경을 치유하는 사회적 순기능 아니면 도리어 그것에 걸림돌이 되는 역기능을 발휘한다. 따라서 이 역기능을 막기 위해서는 자기 치료 외에 한차원 높은 의식의 이입이 요구된다.
하지만 언제나 에릭 클랩튼은 자기 치료의 단계에만 머물렀다. 기타 예술에 치중한 그는 록과 블루스의 사회적 기능을 신뢰하지 않았고 록의 폭발성도 저버렸다. 그의 언플러그드 앨범에 록계가 더러 시큰둥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록계 일각에서는 "그의 표면적인 성공은 아들의 죽음을 판 대가."라는 악평도 나돌았다.
천국의 눈물이 에릭 입장에서는 애절함의 순수한 자기표현 뿐이었을지라도 그것은 의도하든 안하는 보수, 복고적인 언플러그드의 유행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로 인해 촉발된 언플러그드는 타깃이 신세대의 록인 얼터너티브는 아니었다고 변명할 지 모르지만 그 스타일과 음악대상층은 엄연히 얼터너티브에 반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도 그는 자기 치료라는 명분 아래 개인적인 문제에 집착해 사회에 대한 젊음의 음악 표현인 록의 본질, 아니 임무 수행에 소홀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가 영화배우 휠러 니콜슨과 정열을 불태우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 것이 사실이라면 천국의 눈물로 연상되는 그의 이미지에 커다란 흠집을 남길 것이다. 그는 참으로 록이, 아니 대중 음악이 과연 무엇으로 향해야 하는가, 즉 '예술적 표현인가'아니면 '사회적 표출인가'를 따져 보게 하는 표본과도 같은 인물이다. 후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서글픔으로 다가온다.
95년 5월
블루스/하드락/정통메탈 [참고] 펑크의 표적들4 - EAGL... 번호: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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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시 자 : 에랄랄라(윤세민)
게 시 일 : 98/05/02 22:50:30
수 정 일 :
크 기 : 3.5K
조회횟수 : 181
록, 그 폭발하는 젊음의 미학 창공사. 임진모
미국의 질서를 대변한 가장 미국적인 그룹.
14년만에 재결합한 이글스의 엠티비 공연 실황을 수록한 뮤직 비디오 Hell reezes Over는 무엇보다 같은 제목의 음반보다는 불만 요소들이 적다. 해산 당시를 돌이켜보면 도저히 합칠 것 같지 않던 멤버들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손잡고 호흡을 맞추는 감개무량함을 화면으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무척 사실적이며 재결합의 떠들썩한 화제에 비해 막상 신곡이 4곡밖에 되지 않아 다소 실망스러웠던 '음반의 함량미달'도 거의 연상되지 않는다.
맨 앞에 재결합에 대한 멤버들의 소감을 집어 넣었는데 의례적이면서도 꽤나 인상적이다.
"(다시 뭉쳐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계속 설득하고 있었다." -돈 헨리
"실패의 위험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흥분되었다." -티모시 슈미트
"다시 만나니 예전의 갈등은 없어졌다. "돈 팰더
"14년이 흐른 것 같지 않고 마치 일주일을 쉰 것 같았다." - 조 월시
음반에 없는 두 곡 Help Me Through The Night과 The Heart Of The Matter이 보너스로 추가되어 있는 것도 만족스럽다. 그러나 음반에 비해 가장 흡족스러운 것은 이 비디오 앨범이 돌아온 영웅들다운 품격과 그들을 통해 어제와 오늘의 미국이 은연중에 암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멤버 다섯 명 전원이 일렬 횡대로 앉아 연주하며 노래부르는 질서에서 엿볼 수 있다. 그 질서가 다름 아닌 미국의 상징인 독수리를 그룹명으로 내건 가장 미국적인 밴드 이글스의 참모습이었다. 실재로 이글스는 60년대의 이상과 흥분, 80년대의 탐욕사이에 위치한 긴장과 갈등의 70년대 미국을 말해 주는 그룹으로 팝 역사에 기록된다. 그들은 잠재된 혼돈 속에서 언제나 시대적 특성다운 차분함과 중간적 성격을 유지해 왔다. 그것은 그들을 최고로 만들어 준 70년대 전서계의 팝 대중에게는 추억이기도 하지만 얼터너티브 록의 파괴성과 랩의 고동에 시달리고 있는 소란한 이 시대에 더욱 절실한 요구였는지도 모른다. 왜 이글스에 대한 재결성에 대한 관심과 폭발적 호릉이 따르는가 하는 의문의 실마리를 푸는 열쇠가 여기에 있다.
초반부의 어쿠스틱 무대에서 멤버들이 펼치는 기타 앙상블이 이미 감동의 시청을 예약한다. 이 언플러그드 순서에서 하이라이트는 Learn To Be Still일 것이다. 다섯명 모두 기타를 치는 모습과 거기서 퍼져 나오는 층일감은 곡 제목처럼 차분하게 연주하는 법을 일반에게 제시하는 듯 하다. 따라서 이 비디오는 가라앉은 록음악을 열망하는 수요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음악 선물이다. 이같은 성격은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현악 반주를 곁들인 중반부의 곡들 New York Minute과 Last Resort 등에 서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이들의 무대는 점증의 기법이 활용되고 있다. 느린 템포로 무드를 잡은 뒤 후반으 로 갈수록 빠른 템포로 연주해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방법이다. 이에 따라 점차 록스테이지로 돌변한다.
마지막에는 다시 오케스트라를 동원해 초기 곡인 Desperado 로 앙코르 분위기의 차분한 마무리를 짓는다. 실로 한 편의 소설같은 완벽한 기승전결이다. 다시 말해 레퍼토리 배열에서도 이글스다운 질서가 부여된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이글스의 엠티비 공연지 자연스럽지 못하고 컴퓨터로 큐시트를 짰으며 지나치게 달러를 의식한 것이 아니냐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어딘가 모르 게 일반 록공연의 소음, 필링, 그리고 유머가 부족하다. 아직 멤버간의 갈등이 앙금으로 남아서일까 아니면 그들 자체가 원래 록의 핏기가 없는 평범한 그룹이라서 그런 걸까.
이러저러한 이유로 일부 언론은 이들의 재결합 공연을 두고 "차라리 제각각이 낫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차분하다는 점에서 압권이기도 하지만 이글스와 그 무대는 에너지와 카리스마가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강한 록에 익숙한 요즘 얼터너티브 록 팬들 입장에서는 만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에게 무거운 측면을 요구하는 것도 무리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가벼운 록을 구사하는 그룹이고 또 그것이 70년대 미국 록의 색깔인 것을 어찌하랴.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미국적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95년 5월